[생각] 당신(진보)의 미래가 있기에 ‘차별’은 불멸한다.



1. 개요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최근에 차별 금지법 등 차별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어서 차별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 해보고자 했다. 어렸을 당시 정리하지 못했던 생각을 정리하고자 글을 쓰겠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미래가 존재하기에 선택하는 행위가 있고 선택이 존재하기에 차별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겠다. 어떤 생명체이든 자유 의지를 갖고 있고 그 의지에서 비롯된 선택권 있다고 믿고 스스로 선택할 힘을 지녔다는 감각을 느끼는 생명체가 있는 한 차별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차별의 존재는 자연스러움이자 시기마다 대응해야 하는 과제이지 없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둘 이상의 인격체가 있다면(사회가 있다면) 사라지지 않는 자연스러운 존재이다. 둘 이상이 존재하면 차이가 발생하고 그 차이는 차별을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완전히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유의지를 없애는 방법 밖에 없어 보인다. 이전의 글에서 자유의지는 욕구와 추구하는 감정이라고 말했었다.(참조 : [생각] 자유를 위한 자유 의지는 어디서 오는가?) 욕구(감정)가 없어지면 부당함도 정당함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자유의지를 제거하는 방법은 옳아 보이지 않는다.



차별이 생기는 원인과 차별을 줄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본질을 찾아보는 것이 지속적인 해결책을 얻을 수 있는 원리를 제공하기에 차별을 줄이는 미래를 위해서 고민해 보고자 한다.

2. 본문


2.1. 사전적 의미의 차별


차별差別발음 [ 차별 ] 파생어 차별-되다차별-하다차별-적

1.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함.


차별이라는 단어는 수준(높낮이, 넓고좁음, 많고적음 등의 기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나누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둘 이상’ 이라는 단어와 ‘수준 차이’와 ‘구별’이 특징되는 단어로 보인다.

등급이나 수준을 정하는 일이 전제(앞서 이뤄짐)가 되야 함을 이야기 한다. 등급이나 수준을 정한다는 것은 어떤 행위나 물질 등 대상물에 가치를 설정하는 것이다. 차별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가치를 판단한 후에 이에 우선순위를 두어서 구분하는 행위인 것이다.



차별이라는 단어에는 부당하다와 정당하다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2021년 정치권에서는 차별이라는 단어에 부당함이라는 단어를 내포하는 듯한 의미를 부여한다. 부당한 차별은 무엇인가? 겪은바 부당한 차별은 어느 누군가의 선택 기준(수준의 대상)이 자신의 선택 기준에 맞지 않았을 때 이에 대해서 부당한 차별이라 일컫는 말로 보인다.

기준으로는 피부색, 학벌, 부, 국적, 나이, 점수 등 환경에 따라 목적하는 가치관에 따라 여러 기준이 있다.

가령 누군가 상대가 가진 돈을 기준으로 차이를 두어서 선발 기준을 잡았다고 해보자. 이것이 부당해 보이는가? 돈이 많고 적음으로 기준을 미리 정하고 공표했고 그와 같이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이러한 차별은 일반 상식상 문제가 될 일이 없다. 반대로 많은 돈은 지녔음에도 적절한 서비스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 상황이 부당한 차별로 다가올 것이다.



다른 돈을 지불했는데 같은 서비스를 받는 경우나 다른 서비스를 받았는데 같은 돈을 지불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부당한 차별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미리 기준을 언급하거나 공통된 기준을 선정하는 것이 그나마 부당한 차별을 줄이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차별은 보상이라는 결과에도 기준에 따른 가치에 맞아야 되는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건 차별에는 정당한 차별과 부당한 차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차별이라는 단어 그 자체로서는 가치 중립적이라 할 수 있어 보인다.

2.2. 선택(선호)가 만드는 차별


우리가 ‘부당한 차별이다!’라고 외치는 경우를 보자. 부당한 차별이라 하는 것은 지적을 받은 사람의 선택 기준이 지적하는 사람이 생각하기에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당신은 차별을 하고 있다고 언급해주는 것은 당신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고 언급함으로서 선택에 어려움을 주고 상대에게 자신의 올바름을 강요하는 행위로 보인다.

누군가에게 당신이 차별을 하고 있다고 하는 이들은 그들의 선택 방식에 개입을 하겠다는 의미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차별이 없는 선택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자 한다.



우리에게 자유가 있는한 욕망이라는 것이 생기는한 의지가 존재하는한 현실에서는 스스로 생각하길 더 좋은 선택이 존재한다. 인간의 의지가 들어간 어느 물체나 대상이 선택되고 선택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선택에서 자신의 선호에 의해서 우위를 정하며 수많은 선택 받지 못하는 대상을 남긴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든 의식을 하든 말이다. 우리는 선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차별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에서 차별을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해서는 선택이라는 행위를 원천적으로 막으면 되지만 개요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지나친 자유의 침해이다.

이 점이 개요와 제목에서 말했듯이 차별이 불멸한다는 근거이다.



누군가 선택을 했다는 것은 선택되지 않은 것이 생기게 되며 이는 차별로 인식되는 씨앗이 된다.

선택을 당하는 입장에 서면 우리는 기대라는 것을 하는한 배신감, 패배감 등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선택을 받지 못하는 대상은 부당한 차별이라 느껴질 가능성이 있다.

즉, 선택이라는 행위는 부당한 차별을 만드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2.3. 선택하는 사람도 선택 받는 사람도 차별화를 원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생각하기 더 좋은 더 나은 미래를 원한다. 이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올바른 선택을 하게 만들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덜 좋은 혹은 나쁜 미래를 선택하지 않게 한다. 기준이 개인의 선호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가 흔히들 말하는 차별의 본질로 보인다.

즉, 차별을 금지하겠다는 말의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그 기준을 보아야 한다. 다만 선호를 개인이 아닌 집단이 강제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차별의 부정적인 면이 강조되는 측면이 있지만 차별의 긍정적인 측면도 보아야 할 것이다. 차별은 사전적 의미로는 중립적인 단어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해석하기에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이에 관해서 언급해 본다.



정당한 차별이라 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의 이로운 점을 강화한다. 더 높은 능력과 더 좋은 효율을 가져와서 더 빠르게 더 자유롭게 세상을 변화 시킨다. 차별은 차별 당하는자에게 발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으며 이는 선택하는 사람도 선택 받는 사람도 서로 더 나아지는 삶을 만들어가는 미래를 만들 가능성도 있다.

차별을 없애기를 원하는 것 같지만 자연과 현실은 남들 보다 더 나아지고 더 좋아지고 싶다는 욕구에서 개개인들이 자처해서 차별을 원한다.별화된 선택을 개인 단위에서 국가 단위에서 갈망함은 인류 존재 이래로 변함이 없어 보인다.

결국 차별이라는 것은 시대상과 현실을 적절히 파악해서 이용할 수 있다면 이는 꼭 부당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차별이 아니라 공정한가 공정하지 않은가로 생각해야 된다. 다른 돈을 지불했는데 같은 서비스를 받는 경우나 다른 서비스를 받았는데 같은 돈을 지불 하는 경우가 문제인 것이다.

2.4. 금지되는 선택(선호) 기준은 무엇인가?


동가홍상(同價紅裳)이란 말이 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뜻으로, 같은 값이면 좋은 물건을 가짐을 이르는 말이다. 선호를 차별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게 인종으로 치환되면 차별이라고 할 수 있고 차별이라 인식된다. 같은 능력인데 피부색이 다른 상황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피부색의 지원자를 뽑게 되면 이는 논란이 된다.

하지만 시장원리상 두명의 지원자를 뽑을 수 없기 때문에 추가적인 능력 및 효율에 관해서 추가적인 차별 기준을 가지고 선정하는 것이 정의(正義)로서는 옳아 보인다. 다만 외부에서 보기에 피부색에 의해서 차별이 있었다고 인식되며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기는 것은 당혹스러워 보여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추가적인 선별 과정에서 유발되는 비용으로 정의(正義)의 실현을 위해서 돈(힘)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된 것이다.

한편 현재 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차별은 인종이 대표적으로 보인다. 그밖에도 언급되는 것은 종교, 성별 등이 금기되는 차별로 언급된다. 즉, 선별 혹은 선정 기준으로 인종, 종교(사상), 성별을 사용하면 부당한 차별이라는 것이다.



다만 위의 세가지 중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종교(사상)에 관해서는 조금 이견이 있지만 시장원리 상 무언가를 차별 기준으로 삼고 선별 및 선정 함에 있어서 그 기준으로 더 좋고 더 나은 능률과 효율을 가져와야만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로 완전한 시장원리가 작동하는 감정적으로 분리된 사회에서는 위에 언급된 부당한 차별일 일어나는 기준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시장원리가 잘 작동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차별이라는 것이 더욱 존재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시장원리가 완전히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선발 및 선별이 오직 능력과 효율만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완전한 시장원리가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능력과 효율에 비해서 인종이라는 기준은 선택 기준의 우선순위가 더 낮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능력과 효율을 제외한 모든 기준들은 지양해야하는 기준이라는 것이 시장원리를 우선시 하는 사람들의 근원적 원칙일 수 있어 보인다. 만약 차별 금지법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시장원리를 사랑하는 자본주의자 입장이라면 인종과 종교 및 성별의 시장적 독점을 막는 다는 입장에서 그 정당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차별을 금기시 하는 것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한 기준들로 보인다. 자신의 피부색, 성별 등이다. 이에 반해서 부모의 금전적 지원, 종교, 국가의 교육 환경, 복지 등 의지적으로 스스로 자유인이라면 거부할 수도 있는 것들에게는 그 기준을 적용하는게 어렵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뭐 이러한 생각도 지금의 사회적 정의를 받아들이는 필자 개인적 정의일 뿐임을 미리 밝힌다. 또한 시장원리가 적용하는 기준인 능률과 효율에도 문제는 있다.

시장원리는 결국 소외되는 낙오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는 자유주의자들의 약점 도덕(연민)이라는 것을 대두 시킨다. 이러한 측면도 있음을 필자도 인지하고 있다. 다만 소외되는 낙오자들이 경제 발전과 제도적 보완으로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2.5. 부정적 차별 문제가 대두되는 이유


나로서는 요즘 차별이라는 문제가 정치 문제가 된 이유로 선택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지원자에 비해서 합격자가 매우 적게되는 사회에서는 선택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양산된다. 이러한 현상은 기회가 줄어드는 사회에서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사회 문제로서 차별이란 주제가 대두되는 이유는 많은 이들이 사회에서 낙오하고 더 적은 기회를 얻으며 비중적으로 많은 이들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회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낙오하는 이들이 주워진 기회가 적게되면 선별과 선호 기준에 관해서 의심하게 된다. 이는 일반적인 시장원리가 돌아가는 능력과 효율이라는 기준에 의심을 하게 되며 인종, 사상, 성별이라는 금기되는 기준이 섞여 있다고 해석되서 상황이 악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흑인이기 때문에 떨어진 것이다.’, ‘이슬람을 믿었기 때문에 떨어진 것이다.’,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에 떨어진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떨어진 것이다.’, ‘백인이기 때문에 붙었다.’, ‘이슬람인 덕분에 붙었다.’, ‘기독교를 믿었기에 붙은 것이다.’, ‘여성인 덕분에 붙었다.’ 등으로 혼란이 야기된다.

차별은 좋은 성과를 낸 사람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차별로 얻은 과분한 성과를 알고 있음에도 어물정 넘어가는 이들이며 사회에서 또다른 혼란의 씨앗일 것이다. 흔히들 고위 공직자들의 부정이 대표적으로 대중들이 느끼는 차별로 인해 해택을 받는 예일 것이다.



그럼에도 차별로서 부당한 이득을 보는 사회에서 문제가 지적되지 않고 지나치게 되면 이는 지속적으로 사회의 효율과 능률이 떨어지게하고 전체적인 손해를 입혀 국가의 이익을 축소 시키고 덜 자유로운 나라를 만드는데 기여하게 된다.

분명히 능률과 효율을 최우선으로 했지만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고 이는 사회 갈등이 유발된다. 차별에 관해 영원히 사회에서 논의 되야하는 이유는 야기되고 유발되는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하게된 이들이 모인 사회가 다시금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 악순환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부당한 차별은 사회 갈등을 유발시키고 야기시키기에 논의될 필요가 있다.

2.6. 차별을 줄이기 위한 방법


2.6.1. 신분 차별과 인종 차별


그러면 차별을 줄이기 위해서 무슨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까? 아니면 차별을 줄이기 위한 방법으로 무엇이 있을까 보민해 본다. 방법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에 있었던 사라진 차별로부터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과거에 있었던 차별인 계급차별 즉, 귀족과 일반시민이라는 계급 차별이 없어진 현상을 관찰해 보자.

일단은 계급이 사라졌다. 즉, 기준이 사라진 것이다. 기준이 사라진 원인은 시민혁명이 있었다. 또한 계급이 의미가 없어진 사회가 된 것이다. 그 상황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시민의 힘이 강해졌고 사회제도적으로 힘을 인정 받았다는 점이다.


castle, rococo, behaviour-2795472.jpg

차별이라고 불리는 기준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차별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힘이 강해지고 그 힘을 인정하는 사회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종에 관해서 말하면 차별을 받는다는 인종이 차별 한다는 인종 만큼이나 힘이 강해지거나 사회적으로 인정 받으면 된다.

힘이라 하면 교육, 경제력에서 쌓인 사회 구성력이겠다. 앞에와 같은 해결책은 차별 당한다는 당사자가 스스로 힘을 길러 차별에 맞선다는 정공적인 방법이다. 다만 사회적으로 많은 저항에 부딪치고 지속성을 유지하기 힘든 한계가 신분 문제에서는 역사에 예가 보이고 인종 문제에서는 미국의 예가 보인다.

뉴스를 통해본 미국의 상황을 예로 본다면 결국은 부정적 차별이 제도적으로 없음에도 대상이 부정적 차별을 느끼는 경우에 사회적으로 부정적 인식에 빠질 계기가 다분하다면 이는 지속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다. 또한 뉴스로 확대 재생산한다면 부당한 차별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보기에 미국이라는 사회는 남북전쟁 이래로 많은 부분에서 제도적으로 인종 차별은 없어졌으나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다만 인종 특히 흑인이 차별 받는 이유에 관해서 추가적인 생각을 정리본다.

과연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피부색을 기준으로 차별을 하는게 부당하지만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 원인도 고민해 봤다. 우리는 선호가 정해지는 인종 차별적 감각이 생긴 출처를 알아야 한다. 과연 우리의 세계에서는 흑인이 차별 받는 이미지이지만 다른 세상에서는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을까? 흑인이 먼저 문명화 됐다면 반대가 되었을까?

흑인에 관한 차별은 인간의 본능으로 부터 생기는 선호의 차이인가? 흑인에 관한 안좋은 감정은 교육을 통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일까? 유전적 혹은 환경적으로도 그러한 차별이 유도되는 것은 아닐까 의문해 보았다.

인간의 감각 기관과 신경의 진화가 태양 빛과 같이 밝은 계열에 좋은 느낌을 받고 어두운 계열에는 밤을 연상 시키게 되어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게 되기에 우리는 흑인에 관해서 부정적이고 차별적인 행동이 자연적으로 유도되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추측해본다. 황인에 관한 차별이 흑인에 관한 차별보다 심하지 않아 보이는 근거로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굳이 말하면 운이 좋지 않았다라고 말할수도 있겠다. 안타깝지만 남성과 여성의 차이처럼 흑인과 백인 그리고 황인에 관해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한다. 그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적인 부분이아니라 유전적 감각의 문제에서 말이다.

과학이 발전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확실한 진전은 어렵고 어느 선에서 타협하는 사회적인 협의가 이루어지길을 지속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즉, 지속적인 마찰을 피할 수 없는 문제로 보인다.



그럼에도 무엇이 되었든 제일 위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와 의지를 보장해 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인격체의 존중 즉,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공통적인 견해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현재로서 필자의 생각으로 모든 사상의 근본은 자유의지라는 모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니라 그 자유의지라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보다도 앞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인공 생명체가 등장했을 때 그들이 받아 들일 수 있는 사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또한 강아지뿐만아니라 송아지, 병아리도 생명으로서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으니 생명의 의지를 희생시키지 않는 미래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2.6.2. 진보는 과거의 차별을 없애고 새로운 미래의 차별을 만든다


그보다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입장에서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과거의 차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이전 사회에 비해 발전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사회에서는 차별을 느끼는 경향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재배기술, 배송기술, 보관기술의 발달로 바나나 하나를 놓고 싸울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엇듯. 소수만 자동차를 가질 수 있는 차별적인 사회가 아니게 되었듯이.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개인의 힘을 키워 신분제도를 무력화 했듯이.

인쇄술, 컴퓨터 통신, 값 싸진 영상제작 도구, 이동 수단의 발달, 손쉬워진 정보의 교환 등이 지역 간의 격차와 차별을 줄였고 인종이 아닌 차별 없이 글의 내용과 연구 성과로만 판단할 수 있게 해주고 귀족들만 누렸던 창작 활동이나 예술 활동을 격차 없이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과거에 있었던 목숨을 걸고 차지하고 다투었던 것들을 지금 보기에는 미개하다고 말할 정도로 사소한 욕망의 다툼으로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과거에 지켜지지 못했던 많은 영역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주는 사회로 탈바꿈해 주웠다. 또한 더 나아가 최근에는 기회의 평등도 많은 영역에서 보장해 주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많은 차별을 무력화 시켰지만 새로운 차별도 꾸준히 만들어 낸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차별이 생길 것으로도 예상된다. 의료분야에서 그 차별이 예상되는데 지금도 치료비가 없어서 생존을 할 수 있는 질병을 겪어 생명을 잃는 경우가 있다.

훗날 영생하는 기술일 만들어졌을 때 우리는 영생을 할 수 있는 기술을 받느냐 못 받느냐에 따라서 엄청난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또한 인공 신체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이 미래에 온다면 자동적으로 과거에 차별을 하면 안되는 기준이였던 인종이나 성별 문제는 단순히 취향이나 선택 사항이 될 수 있다.

가능할 지는 미지수이지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을 업로드 하고 다운로드 할 정도의 미래 과학 기술이 발달된 상황이라면 인종과 성별은 취향 문제 정도로 생각되고 차별 문제로 대두되지 않을 것이다. 원하는 일을 위해서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 인종이나 성별을 취사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살인에 관해서도 업로드 못한 시기에 관한 기억들에 관한 무게로 죄의 질을 따질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무게의 죄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기억을 업로드하고 다운받는 시기 이전에 인공신체에 관한 기술만 발전한 시기에는 살인은 되살릴 수는 없는 영생을 할 수 있는 인간을 죽이게 된 경우가 되므로 매우 심각한 죄로 처벌 받을 것이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아직 공상 수준이고 너무나 이뤄질 수 없는 꿈같은 이야기이다. 전혀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니 재미로 들어줬으리라 생각한다. 아직까지 우리의 기술은 너무 미개하며 한계가 다분하다. 신체 선택의 자유가 생기는 날 우리는 인종과 성별 문제에서 해방될 것이다. 육체라는 제한을 벗어나고 수명이라는 제한을 벗어나는 것으로 우리는 보다 높은 자유를 누리고 선택권이 없었던 신체의 차이를 없애고 차별을 끈어 낼 수 있어 보인다.

2.6.3. 공정과 기회, 희망이 있는 사회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고 선택을 당하는 입장에서 그 기준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들에 차별을 느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부당한 차별이라는 것에 본질이다. 스스로 선택권이 없다고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좌절을 일으키고 차별이라고 인식되는 것이다.

바꿀수 없는 것들 피부색, 얼굴 생김새, 신체적 특징, 성별, 난치병, 스스로 생각하기에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것들이다.

선택에서 배제된 것들이 모두 차별을 받았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선택에 사용된 그 기준이 투명하게 공개 되도록 하고 차별을 느끼는 이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는 것이 차별을 느끼는 이들을 줄일 수 있다.



부당한 차별이라는 것은 결국은 부당한 차별이라고 느끼는 사람의 수를 줄이고 그들이 부당함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 현실 사회의 주요 과제인 셈이다.

선택의 기준이 투명하게 공개되었고 그 선발이 다수가 납득할만 해야한다. 그럼에도 이를 차별이라 느끼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 고통 받는 이가 기준이 공정했다고 느끼게 설득하고 다른 선택에 참여 할 수 있거나 선택 받지 않게 격리되지 않게 하고 선택에서 배제된 것이 중요하지 않게 힘을 주는 것이 더욱 올바른 길일 것이다. 즉, 다향한 기회가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차별이 사회에서 많이 발생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인간의 의식주가 위협 받고 있고 삶이 팍팍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이 살기에 어려움을 느끼기에 대두되는 문제중 하나이다. 좌절하더라도 이전과 다른 희망과 대체될 수 있는 꿈과 기회가 다양하게 존재한다면 차별 받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이 그나마 제일 올바른 방법이라 생각한다.



‘차별를 받는다’ 외치는 이들의 좌절감을 회복시키는 이상적 해결책은 ‘차별 받는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자기발전이고 더 나은 삶이다.

2.7. 차별을 금지하도록 법으로 정해야 되는가?


우리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차별을 만들 수밖에 없다. 차별의 생성은 자연적인 것이다. 이를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지나치면 사람들의 선택의 자유에 위해를 가할 것이다. 자유를 느끼게 하고 불만을 줄이는 방법중 제일 간단한 것은 우리가 선택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최근에 도입하고자 하는 차별 금지법은 선택에 더 많은 비용을 추가하게 할 것이 예상된다. 명시되어 있는 기준중 하나인 성별에 관해서 말해보자. 기업에서는 험지에서 일하는 사람을 뽑는 경우에는 대체로 남성을 뽑기를 원할 것이다. 또한 많은 월급을 보장해줘야 한다. 그러나 이는 여성에게 차별로 인식될 수 있다. 남성은 일반적으로 힘이 강하다는 상식에서 비롯된 차별이라는 것이다. 차별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테스트를 통해서 기준을 잡고 뽑아서 증명을 하는 행위가 들어가야 할 것이다.



들어올릴 수 있는 일정의 무게와 악력, 혐지 극복 능력 등 말이다. 이런 기준을 통과하는 인원은 대부분 남성이 될 것이다. 다만 과거에 사례에서와 같이 이를 남성만 뽑기 위한 기준이라고 비판하며 선별 기준의 수준을 낮추게 한 행위가 과거 한국에서 있어 왔다. 개인적으로 차등적 기준을 성별에 따라 제시한 것은 매우 잘못된 정책이였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는 차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차별을 금지 하겠다는 것은 잘못될 경우 우리에게 올바른 기준으로 선택 할 수 있는 행위를 억압할 수도 있는 행위이다. 기업을 공격할 수 있는, 어느 한 개인을 공격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지나친 자유의 억압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차별을 행했다는 대상에게 상대의 선택 기준을 추궁해야 법에 처벌이 가능할 터이다. 그런데 선택 기준을 글로 적어놓지 않는 사람이 많기에 이를 처벌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차별을 했다는 기준은 감정적으로 도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부당한 차별은 도덕적 기준일 경우 상황 즉, 시간, 위치, 구성원 등 여러 환경에 따라서 기준이 변화하기에 정당함과 부당함이 수시로 바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선택을 달리 해야하는 상황과 의지에 의해서 차별이 생기는 것이다.

이를 법으로 강제한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택에서 배제된 것들이 모두 차별을 받았다고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선택에 사용된 그 기준이 투명하게 공개되는게 차별을 느끼는 이들에게 최대한의 배려일 것이지 그 분한 감정을 선택한 이에게 과하게 표하거나 선택에 두려움을 느끼거나 그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억압하는 선까지는 법으로 위해를 가하면 안되는 것이다.

차별을 금지한다는 법은 자유를 늘리는 방향성이 아니라 자유를 억압할 수도 있는 매우 애매한 법이다.



우리는 인간의 가치를 나누고 싶어하지만 도덕적으로 가치를 나누면 안된다고 한다. 일전의 글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나눈다고 언급했었다. (참조 : [생각] 인간, 사람의 현실 가치의 탐구) 이점이 차별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요번 글에서 확장적으로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별을 금지하는 것을 법으로 정한다는 것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차별을 막자고 하는 이들이 차별을 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최근에 읽은 책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있던 글 두 문장을 인용하고 싶다.

개인들이 피부색, 인종, 종교를 이유로 고용상 차별을 할 수 없다고 국가가 선언하는 것이 적절하다면, 다수가 동의할 때는 피부색, 인종, 종교에 따라 고용상 차별을 해야 한다고 국가가 선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타당하다.

자본주의와 자유P.186

이미 강조했듯이 피부색과 같은 특정기준이 부적절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는 동시대 시민들이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갖도록 설득하는 일이지, 국가의 강제력을 동원하여 동시대 시민들에게 우리의 원칙에 맞춰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일이 아니다.

자본주의와 자유P.188

3. 마무리


3.1. 차별 문제도 결국 올바름에 관한 고민


인종, 나이, 생각, 학벌, 성별 등의 기준으로 각각의 역할이 나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절대로 결과적으로 평등할 수는 없다. 그 역할을 차별로 여기지 않도록 만드는게 옳은 방향이지 차별이라 규정하여 선택한 이를 처벌할 권리는 좀 지나칠 수도 있다.

자격요건(기준)이 있는 모든 것을 차별이라 하면 안될 것이다. 운전면허도 왜 성인만 취득 할 수있는가? 왜 대통령은 나이제한이 있는가? 차별에 본질적인 의미를 생각해 본다. 아동에게는 왜 그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을 못하게 하는가? 왜 의료는 의사만 하는가? 왜 운전은 자격증이 있는 사람만 하는가? 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사람들만 살아야 하는가? 그 근거만 다수에게 인정 받고 차별이라고 생각되지 않게 하는게 중요한 것도 있다.

기준을 채운 다양성은 좋지만 기준도 채우지 못한 다양성은 문제가 될 수 있고 사회의 혼란을 야기한다. 물론 독실한 자유주의자에게는 위에 여러 의문들 중 나이와 의료 자격 등의 제한에 관해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 나이에 관한 자격요건은 행정적인 문제와 통계적인 결과에 따른 행정의 편의성과 관련해서 협의에 의해서 정해진 것일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아무리 종교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종교를 구분하는 일이 생명을 구분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언급하는 것은 잘못된 우선순위라고 보여진다. 물론 생명 기준까지 고려해야 하는 문제인지 구별하는게 현실에서는 어려움이 있다. 모든 이슬람인이 테러범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법, 정의를 정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이다.(참조 : [생각] 정의(正義)의 속성 ‘억압’과 ‘우선순위’) 우리가 정하는 정의에 관한 논의는 상충되는 자유의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이다. 살인 행위를 억압함으로서 살해하고 싶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물론 국가는 살해를 필연적으로 어느 선에선 허용한다.

차별을 금지하겠다는 것은 차별하는 자유를 금지함으로서 차별하고 싶다는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국가는 차별을 필연적으로 어느 선에선 허용해야 한다. 그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차별에 관한 내용도 정의(正義)에 관한 내용이기에 이전에 언급했던 홈페이지 내의 많은 글들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3.2. 강제성이 필요한가?


그나마 자유의 성장이 과거에 많이 있었던 차별을 점점 해결해 나갔다고 생각한다. 자본의 발전과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과거에 심각한 차별들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미약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자본의 발달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최소한의 자유를 겨우겨우 지켜나가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기회의 평등을 추구 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다.

다만 사회주의자들이 언급하는 결과의 평등은 절대로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이는 부당한 차별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이 완벽히 다르지 않다는 능력과 효율이 동등하다는 것을 전재하는 것이기에 올바르지 않다. 결과의 평등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실제 현실에서는 차이기 있기 때문에 결과의 평등은 차별을 하겠다는 것을 내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받아 들일 수 있는 평등은 가능성에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신체의 자유를 지닐 수 있는 세상이 와서 질긴 인종과 성별 그리고 장애를 극복 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물론 그 세상은 인공신체의 성능 차이로 부터 야기되는 차별로 다투고 있겠지만 말이다.



차별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은 욕구로 차별 문제가 대두 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개개인들이 현재의 차별에 대한 해결책 내놓게 될 것이고 미래에 생기는 새로운 차별도 또한 해결해 나갈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체된 발전이 좀 더 나아진다면 차별이 완화하고 더 빠르게 많은 이들이 차별이 줄어든 세상을 누리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선택의 기준이 되는 것이 차별의 기준이 되며 이를 제한하는 행위는 우리는 선택할 자유를 잃게 될 위험이 있다. 효율적인 선별 기준을 잃은 집단은 다른 차별(기준)을 양성하게 될 것이다. 차별을 금지하겠는다는 것은 비효율을 양성하는 잘못된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 수 있는 위험도 존재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차별을 하는 것이 효율적인가 차별을 하지 않는 것이 효율적인가에 관해서 시장의 자율에 맞기자고 하는 자유주의적 의견이다. 밀턴 프리드먼은 부당한 차별을 하는 사업가는 스스로 자신의 선택권을 축소 시키는 비효율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하며 시장의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 차별을 하는 주체는 도태되고 소멸될 것이라 했다.

반면 사회주의적 관점으로는 사업가 자신의 선택권을 축소 했음에도 더욱 큰 힘을 지닌 이들의 카르텔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 다양성보다 효율적이게 되며 이는 점점 양극화가 된다는 생각이며 이는 자발적으로 절대 극복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회주의자의 관점은 차별 받는 이들이 자생력이 없고 카르텔을 형성한 이들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태라고 단정짓는 사고로 부터 쌓아 올려지는 논리로 보인다.

반면 자유주의자는 차별 받는 이들을 옹호하고 차별을 없애자고 하는 이들의 힘이 결국은 법적인 차별금지 없이도 더 효율적으로 자정 될 수 있음을 논리의 바닥부터 쌓아 올리는 논리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를 따른 사람들은 개인의 힘과 개개인의 의지가 고처나가는 세상이 더욱 좋아질 것이라는 매우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사상이며

사회주의자는 개개인이 절대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구조와 틀이 이미 사회에 있으며 이는 강제로 집행하지 않으면 유지되기 힘들다는 매우 비관적인 생각이 내부에 있다고 보여진다.

인간은 변증적으로 타협을 하며 제도를 만들어갔다. 무조건적인 자유만으로는 자유를 누릴 수 없고 사회의 지나친 통제로도 자유를 누릴 수 없다. 발달한 과학과 기술이라는 틀 안에서 우리는 제도를 환경에 따라 타협해 만들어가야 한다.



인류의 진보는 많은 차별을 없애왔고 앞으로도 없애리라 생각한다. 또한 이전과는 다른 또다른 차별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발전해 오면서 차별을 줄여왔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최근에 대두 되는 차별 문제에서 장황한 필자가 생각하는 차별에 관한 생각들을 나열해 보았다. 이밖에도 추가적인 내용이 있겠으나 글이 길어지는 관계로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겠다.

당신의 생각에 좋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글이었길 바라며 글을 마치겠다. 당신의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

구독
통지
1 댓글
가장 오래된
최신 최다 투표
인라인 피드백
모든 댓글 보기

[…] 이 글은 이전에 작성했던 차별에 관한 생각을 정리한 글인 ‘[생각] 당신(진보)의 미래가 있기에 ‘차별’은 불멸한다.‘ 를 쓰기 전에 작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학력 차별은 차별을 만드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