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지금은 철학자를 만나야 할 시간(철학자의 생활에서 지정한 삶을 엿보다) – 서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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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금은 철학자를 만나야 할 시간(철학자의 생활에서 지정한 삶을 엿보다)’ 리뷰 본문

1. ‘지금은 철학자를 만나야 할 시간(철학자의 생활에서 지정한 삶을 엿보다)’ 리뷰 개요


반년 전에 읽은 책이다. 과거에 통신사 맴버쉽 혜택으로 전자책으로 받은 책이다. 철학이라는 단어에 흥미를 느끼고 읽은 책이다. 내 생각으로는 교양 도서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어려운 내용을 다루지는 않고 자주 언급되는 철학자들의 삶과 철학을 조금씩 들어다 보는 책이다.

작가의 생각과 철학자의 언급을 잘 조화롭게 적어 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내가 다시금 인용해서 내 생각과 조화를 시킬 예정이다. 대학교를 다닐 당시 나는 공과 대학을 다녔음에도 예술계 대학을 다니던 누나의 영향으로 방학 중에 문학 책을 조금이나 읽었던 적이 있다.



그 중에 철학 책이 있기는 했지만 앞쪽만 읽고 덮어 버렸던 기억이 있다.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철학 책들은 괴롭게도 어려운 단어를 많이 쓰기도 한다. 처음에 깊이 생각한다는 뜻의 사유(思惟)라는 단어를 보았을 때 당황함이 기억난다.

이렇듯 일반적인 철학과 관련된 책들은 사용 용어가 너무나 일상에서 벗어난 용어가 많고 삶과 멀다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요번에 읽었던 책은 작가가 이해한 철학자의 면면을 독자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작성한 노력이 보인다.

요번에도 읽으면서 영감을 받거나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던 문장들을 가져왔고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참고로 본문의 소제목은 내가 임의로 정한 것으로 책의 차례와는 연관이 없다.

2. ‘지금은 철학자를 만나야 할 시간(철학자의 생활에서 지정한 삶을 엿보다)’ 리뷰 본문


2.1. 작가가 생각하는 철학과 철학을 대하는 자세


철학, 그것은 곧 삶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목표를 정한다. 목표를 조금 품위 있게 표현하면 관觀이 된다. 관을 거창하게 표현하면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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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에 나온 철학에 관해서 한 인상적인 글귀이다. 작가는 철학을 삶이라고 표현했다. 사람의 지향하는 바를 철학이라고 표현한 것이라 보인다. 누군가의 철학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생각하는 목표이자 삶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2.2. 키르케고르, 객관성을 위해 관찰자의 시점에서 자신을 보다.


그리스도교의 교화 내용을 담고 있는 키르케고르의 책을 읽는 독자는 저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어떻게 할지를 선택한다. 이때 키르케고르도 저서를 통해 저자가 아니라 독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듣는다. 즉, 키르케고르는 독자가 되어 키르케고르의 말을 듣는다. 이것이 익명이나 가명의 장점이다. 키르케고르는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자신과 독자를 교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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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신선한 내용이였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관찰자의 시점으로 자신을 보아야 한다(독자의 입장)는 게 인상적이였다. 익명성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2.3. 탈레스, 신을 부정 하기에 과학자인가? 과학자 이기에 신을 부정하는가?


신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신을 부정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고민했을 것이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노력도 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처음으로 고민하고 나름대로 답을 말한 사람이 탈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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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의 철학은 ‘어떻게’에서 시작된다. 탈레스는 자신의 하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다. 그는 어떤 야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탈레스에게 ‘어떻게’라는 질문이 없었다면 그렇게 참지 못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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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세상에서도 많은 이들은 신을 믿는다. 탈레스라는 자연의 원칙과 원리를 찾으려고 했던 과학자였다고 생각된다. 과학과 기술에 마음을 둔다면 고대의 사람도 신에 대한 의심 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2.4. 에피쿠로스, 쾌락이 인간의 사는 목적


제논을 비롯한 스토아학파가 금욕을 지나치게 강요했다면, 에피쿠로스를 중심으로 한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쾌락이야말로 인간이 사는 이유이며 곧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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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정심을 통해 에피쿠로스는 욕망을 줄일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행복은 욕망이란 분모에 성취라는 분자를 통해 얻은 값이다. 욕망이란 분모를 줄이면 행복이란 값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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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홈페이지의 글을 통해서 인간의 자유 의지에 관해서 고민을 했었다. 감각의 잔류인 기억이 자의식이 자아라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쾌락이 인간의 삶의 목적이라는 것은 솔직한 심적으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쾌락도 삶의 목적 중 하나라는게 내 생각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결핍 혹은 고통이 모든 행동에 근원이 되며 이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삶인 것으로 보고 있다.

아무튼 나는 위의 문장에서 인간의 감각을 수치적으로 나타내려고 했다는 점이 재미있다고 보았다. 나는 최근의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감정을 수치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다고 본다. 몇몇은 거부감이 있겠으나 이는 곧 진실이 될 것이라고 본다.

비유를 들자면 과거의 친자임을 밝히기 불가능 했지만 오늘날에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당연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훗날에는 고통이나 쾌락을 수치적으로 나타내는게 당연한 기술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2.5. 베이컨, 지식과 능력, 지식과 감정 그리고 능력과 감정


아는 것이 힘이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어떤 주장이 맞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둘 중 보다 타당성이 있는 주장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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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인 말은 우리에게 고민을 불러 일으키는 힘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읽은 분들은 어떠한 생각을 지니고 있는가? 현실은 ‘아는 것이 힘이다.’로 이루어지고 이를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 글을 볼 수 있다는게 그 힘의 결과 아니겠는가?

모르는 것은 약이 되지 않고 종국에는 잊혀졌으며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2.6. 베이컨, 성공과 우상에 대한 생각


성공의 의미가 비록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성취하고 이루는 무엇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성공적인 삶을 원한다. 베이컨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충성을 다하고 은총을 기다렸다. 스스로 성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베이컨은 ‘성공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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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은 성공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다스리고 권력을 얻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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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 정복을 성공이라고 보는 듯 싶다. 이런 관점도 나름 합당할 수도 있다. 우리는 각자의 목표가 있기에 성공은 그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목표를 이루는 것은 자기 의지의 발현이다. 나는 지배, 정복은 자유를 느끼기 위한 수단이자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성공의 의미는 무엇인가가 떠오르게 하는 문장이다.

베이컨은 선입견이나 편견이 우상에서 온다고 믿었다.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고 있어서 선입견이나 편견이 생기며, 그래서 자연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진리를 깨우치지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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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은 인간이 우상으로 얻은 편견과 선입견을 버린다면 자연의 원리와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베이컨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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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정말로 이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기술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어느 대상을 맹목적으로 절대적으로 믿는 것을 거부한다. 위의 문장들을 보면 중세를 넘어 근대, 산업 시대 유럽의 철학자들이 있었기에 유럽이 발전이 있었다고 느껴진다.

최근에도 인간을 우상으로 따를려고 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이런 이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의 발전은 진행이 더딜 것임이 느껴져서 안타깝다.

2.7. 피히테, 완전한 지배를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며 타언어는 장애가 된다.


정복자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정복지를 자신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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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언어가 중요하다는 말이라서 담아 보았다. 내 홈페이지에 이미 교육의 중요성에 관해서 ‘[공학자 생각] 현대의 인류와 과거의 인류의 다름은 어디서 오는가?‘란 글에서 언급한 적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이나 원시인들과 현대인의 차이는 교육이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었다. 교육이라 하면 환경적인 측면도 연관된다고 말했다. 환경적 측면이라고 한다면 문화에 까지도 접근하는 것이다.

훈계를 통한 교육은 앞선 사람들의 좋은 행동이나 본받아야 할 점을 흉내 내고 모방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육을 받는 학생이 공감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방식이다. 교육은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스스로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교육이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피히테가 ‘선의 쾌감‘을 말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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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교육함에 있어서 상대가 스스로 배움의 의지를 갖지 못한다면 이는 정말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교육에 의지를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권 자유의지를 지키는데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언어를 가진 민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어를 바탕으로 얻은 철학적인 지식과 사상을 정신적으로 교감할 수 있다. 언어가 없고 철학이 없는 민족은 그렇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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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사람의 정체성을 만드는 측면이 있는 듯 싶다. 재미있는 점은 책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어를 바탕으로 철학적인 지식과 사상이 이어짐을 언급하지만 그 언어의 쓰임과 활용은 시대와 사람들에 따라서 세부적인 부분이 꽤나 달라진다는 점이다.



2.8. 루소, 자연에서 인간은 자유와 평화를 누렸다.


자연 상태에서는 불평등이 없고 자유와 평화를 완전하게 누리면서 살았다. 사회가 형성되면서 평등은 사라지고 만다. 루소는 사람들이 만든 제도와 규칙의 부자연스러움과 불행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연 상태의 행복과 자유를 사회나 문화라는 이름으로 구속한다고 본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 인간의 본래 모습으로 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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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를 옹호할 수 있는 문장인 것 같다. 자연 상태에서 어떻게 자유와 평화를 완전이 눌렸는지 의문이다. 자연에 의해 자유와 평화가 위협 받았다는 것이 현재로서는 정론이 아닌가 생각한다.

국가라는 시스템이 아닌 인류 집단 초기에 집단을 이뤄서 자연으로부터 위협 받는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인간이 노력했다는 것을 간과 한게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사회가 형성되면서 평등이 사라졌다는 말은 맞는다고 본다.

제도와 규칙의 부자연스러움이 준 불행도 있겠지만 행복도 있음을 간과한다고 본다. 물론 자연 상태의 행복과 자유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가 가져오는 행복과 자유가 자연 상태에서 얻을 수 잇는 자유와 행복에 비해서 더 클 것이라고 보았고 이를 따라 발전했다고 본다.

자연 상태의 인간의 본래 모습이 더 자유롭고 행복하다는 잘못된 판단이 아닌가 생각한다. 뭐 책에 옮겨 담으면서 루소의 주장이 왜곡될 수도 있었겠으나 문장을 토대로 리뷰하면 이 정도로 생각이 정리된다.

평등은 정의(正義)에 다른 이름이며 평등은 기준(주체)에 따라서 늘 달라지며 자유의지가 존재하는한 사라지지 않는다.

2.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선과 악, 영혼의 안정은 휴식이나 휴가로 얻어지는게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에서 이뤄야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이 만나야 할 사람 중에는 선한 사람도 있지만 악한 사람도 있다고 항상 생각했다. 그렇다고 선의 본질은 아름답고 좋으며, 악의 본질은 추하고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선과 악은 같은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선한 행동을 하거나 악한 행동을 할까? 그는 사람들이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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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이라는 것도 너무나 주관적이라는게 현 생각이지 않나 싶다. 선과 악을 정확히 모르는데 어떻게 그것을 구분 할 수 있겠는가? 선과 악이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다는 말은 맞는 말로 보인다.

결국은 무언가를 행동은 의지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선과 악은 주관적이며 이의 출발은 다양성과 다름이다. 다름은 상대적이며 위치와 시간 등 환경에 따라 정해진다. 우리가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원래부터 정해져 있지 않아서 이다. 이는 환경은 멈춰있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복잡하고 현실적인 문제가 있는 한 장소와 시간에 관계없이 영혼의 안정을 찾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영혼보다 조용한 곳이 없다고 했다. 조용한 영혼을 갖고 있으면 스트레스를 푼다며 휴식이나 휴가를 요구하는 것은 단지 핑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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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말이다. 왜인지 나는 원효대사의 해골물이 생각나는 문장이다. 조용한 영혼은 결국은 스스로의 마음가짐에 의해서 결정되는게 아닌가 생각한다. 다만 마음은 조절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 것이다. 결국은 복잡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없애야만 영혼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2.10. 데카르트, 방법적 회의, 인간의 감각의 의심 그리고 자아


데카르트의 의심은 진리 탐구를 위한 한 방법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방법적 의심, 혹은 방법적 회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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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현실적 벽 어느 선에서는 타협하고 나아가고 있지만 말이다.

첫 번째 데카르트의 법칙은 명증성이다. 한번 의심을 하다 보면 계속 꼬리를 물고 의심을 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 한계에 이르면 아무리 의심하려 해도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무엇에 이른다. 의심할 여지없이 명석하고도 분명한 것이 아니면 진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명증성의 법칙이다.

두 번째는 분석의 법칙이다. 의심의 대상에는 분명 단순한 것도 있지만 복잡한 것도 있다. 데카르트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문제가 될 때까지 분석하기로 생각했다. 단순한 문제가 해결되면 복잡한 문제도 덩달아 해결되리라 믿었다.

셋째는 종합의 법칙이다. 문제는 복잡한 것에서 단순한 것으로 분석해 가지만, 사고는 다르게 보았다. 사고는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사고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종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종합의 법칙을 주장했다.

넷째는 열거의 법칙이다. 분석의 법칙과 종합의 법칙을 문제와 사고에 적용시키되, 빠지는 것은 없는지 살피고 또 살펴보는 열거의 법칙이다. 분석과 종합의 법칙을 계속해서 반복하다보면 놓칠 뻔한 문제나 사고를 빠트리지 않고 챙길 수 있다고 데카르트는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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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언급한 데카르타가 생각하는 방법적 회의 방법이다.



인간의 감각을 의심했다. 지중해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의 시력이 6.4라는 경이적인 결과에 놀란 경험이 있다. 그런가 하면 눈앞의 물건도 분간하지 못하는 고도 난시 환자도 있다. 겨울에 반팔을 입고도 춥지 않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름에 털 코트를 입고도 춥다는 사람이 있다. 과연 인간의 감각을 믿어도 될까? 데카르트의 의심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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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홈페이지 글에서 자유 의지에 관해 고민을 해보았다. 인간의 감각의 기억이 자아를 구성한다는 생각이였다. 감각의 단절은 죽음과 다름이 없고 인간은 자아는 단순한 뇌의 신호 활동인 점이다.

감각의 덩어리로 이뤄져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감각에 의심을 갖는 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듯 싶다.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것이다. 데카르트하면 아래 유명한 문장이 있지 않은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감각의 잔상인 기억이 우리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점은 훗날 연구되고 받아들여지고 감각과 기존의 기억간의 확률적인 상호작용과 우연들의 조합이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임을 점점 밝혀지고 있다고 보인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의심에는 분명 끝이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가 실행한 의심의 끝은 어디일까?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위해 자신의 존재를 걸었다. 의심한다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심할 필요도 없고 대상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한다는 자체가 곧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 나의 존재가 없다면 생각할 존재도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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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문장은 인간이란 존재의 의식을 증명하기 이전의 가설로 매우 흥미로워 보이는 가설이다. 또한 요즘은 마취술이 많이 발달하기에 이를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잠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 간접 체험하고 있지만 말이다.

위의 문장은 유튜브 채널 ‘1분 과학‘에서 아주 재미있게 다룬 내용이다. 채널의 영상을 보면서 내 생각도 정리한 적 있다. 참고하길 바란다. ([유튜브 리뷰] 1분과학,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 2020. 5. 31)



2.11. 쇼펜하우어, 염세주의와 의지


일반적으로 염세주의란, 세계는 원래부터 불합리해서 슬픔으로 가득 차 있으며, 행복이나 즐거움은 덧없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보는 철학적인 사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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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과학을 알고 있는 이들은 우주라는 존재가 매우 넓고 빈 공간이 많음을 알고 있다. 그 요소들은 에너지 덩어리인 우리에게 슬픔이며 두려움이며 공포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에너지를 섭취하지 않으면 세계에 의해서 에너지가 흩터진다.

우주 속에서 티끌도 못한 작은 존재라는 점은 염세주의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개인적 생각으로 모든 행복과 즐거움은 이전에 결핍이나 불행이 선행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고 본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결핍을 우선 느끼며 이를 해결함으로서 즐거움과 행복을 느낀다. 필연적으로 결핍이 증거움과 행복보다 더 빈번하게 찾아온다. 그럼으로 일시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고 본다.

결핍의 정도에 따라서 불행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경우는 많겠고 자신은 슬픔보다 행복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겠으나 자연적으로 결핍의 빈도가 충족의 빈도보다 많을 수밖에 없는게 맞는 것으로 보인다.

염세주의의 반대되는 점은 우리가 결핍이 꼭 슬픔으로 이어지는가에 관한 의문이고 또한 충족이 꼭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가 이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이 염세주의 인듯 싶다.

지성은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지성보다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의지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의지를 갖지 않으면 어떤 자연 세계도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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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 가는 문장이다. 근대 유럽의 철학자들의 내용을 보면 인권의 중요성이 계속계속 상기되는 것 같다.



2.12. 아우구티누스, 진리는 신의 것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가 있기에 인간은 정신을 통해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진리는 인간의 정신이 스스로를 인식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인간 인식은 진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럼 진리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진리는 인간의 정신보다 우월하고, 인간의 정신으로는 진리를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즉, 진리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신의 것이라고 했다. 특히 영원한 진리가 신의 것으로, 진리는 신에서부터 왔다고 그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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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신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그것도 우리의 의식이다. 답은 뇌에 있는 듯 싶다. 아니 뇌도 결국은 자연의 일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다. 신이라는 존재는 개인적인 생각으로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존재라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완벽한 진리의 존재로서 신을 어떻게 부정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신이 중요한가 자유의지가 중요한가를 우선순의에 둔다면 나는 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유의지를 더 우선으로 한다. 자유를 위한 항상심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보인다는게 지금의 생각이다.

2.13. 홉스, 욕망과 힘 그리고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예를 들어 ‘사람은 이성과 감각 중 무엇을 먼저 사용하여 지식을 얻을까?’ 하는 질문이다. 홉스는 감각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다섯 가지 감각을 이용하여 경험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인식한다는 주장이다. 당연히 인간은 경험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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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적인 감각으로 지식을 습득한다. 이전에 나는 자유 의지에 관해서 고민한 적이 있다. ‘[생각] 자유를 위한 자유 의지는 어디서 오는가?‘에서 말이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인간의 의지는 자아는 감각의 축적으로부터 생성된다고 보기에 위의 감각을 통해 지식을 얻는 다는 것은 맞는 말로 보인다. 의지가 없다면 지식을 얻는 것도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홉스는 욕망과 공포라고 주장한다. 홉스는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힘의 욕망인 권력이라고 했다. 강력한 힘인 권력이란 욕망이야말로 죽을 때까지 미래를 책임질 힘이라고 믿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공포를 만들어 낸다. 인간은 약한 존재여서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공포를 느낀다. 공포를 느낄수록 인간은 강한 힘을 욕망한다. 결국 사람은 공포와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누구도 갖지 않은 강력한 권력을 가지려 하거나 이미 가진 사람과 가까이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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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보다 나는 이를 자유의 갈망으로 보았었다. 강한 힘은 자유를 가져다준다. 권력은 오히려 내가 보기에 족쇄로 보이기도 한다. 오늘날 최고로 욕망을 축적하는 이들은 사업가들로 보인다.

훗날이 되면 오늘날 사업가들 조차도 우리가 과거의 왕을 보는 것과 같이 속박을 느끼는 존재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정도로 미래의 욕망의 실현(자유의 성장)이 가늠이 되질 않는 현실이다.

홉스는 사람들이 희망의 평등만 믿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인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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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상태에서의 불안정성을 내보이는 말인 것 같다. 이와는 다른 측면과 철학가들은 자연 상태가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2.14. 트라시마코스, 정의는 승자의 이익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힘 있는 사람의 이익이다.”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트라시마코스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주장하였다. 정의란 힘을 가진 사람의 이익에 따라 만들어지고, 필요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의 말에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필요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며 버럭 화를 낸다. 화를 낸다는 것은 이길 수 없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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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고 본다. 현실에 가까운 결론이라 보인다. 모든 정의는 현재와 미래를 언급해야한다. 이전에 내 글에서 정의는 힘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언급했었다. 정의란 그 자체로 속박이라고 언급했엇다. (참조 : [생각] 정의(正義)의 속성 ‘억압’과 ‘우선순위’)

정의란 현재의 자유를 제한 하지만 미래의 자유를 늘려주는 것들이라고 언급했었다. “정의란 힘 있는 사람의 이익이다.”라는 점은 내가 고민했던 정의의 속성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내용이라 흥미로워서 위 책 내용을 담아 봤다.

2.15. 로크, 태어난 인간은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신이 준 자유와 평등에서는 지배도 복종도 없다.


로크는 완전한 원시적인 상태처럼 어떤 국가나 사회가 형성되지도 구성되지도 않은 상태를 자연 상태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어떤 누구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으며, 남을 구속하지도 않는 상태이다.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누리며 산다. 로크는 자유와 평등은 신이 주었기에 완전한 자유와 평등 상태에서는 지배도 복종도 없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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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루소의 주장과 비슷한 주장이 로크라는 철학자에게도 나왔기에 이를 가져왔다. 위의 주장은 현재로서는 필요성이 덜 느껴진다. 하지만 당시 신분사회 속에서 개인이 느꼈을 억압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위와 같은 주장이 혁명의 장작을 점점 채우지 않았나 생각한다.

사람이 어떤 상태로 태어나는가에 대한 의문과 답은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 로크는 백지설을 주장한다. 사람은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백지 상태로 태어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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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비슷 생각을 지니고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이들을 서로 종합적으로 두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다. 나의 경우 ‘[생각] 자유를 위한 자유 의지는 어디서 오는가?‘에서 언급 했다 싶이 위의 백지설과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내 생각과 비슷하기에 책에서 가져와 봤다.



2.16. 라이프니츠,만물은 서로 상호작용 하며 무생물에도 의식이 있다.


바닷가에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자. 바람 소리 못지않게 파도 소리도 듣는다. 파도 소리는 어디서 올까? 보이지 않는 물방울이 모인 바다라는 거대한 물이 만들어 내는 소리일 것이다. 물방울 하나하나의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물방울이 모여 내는 거대한 파도 소리는 들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무생물의 의식은 아주 희미하고 미미할지 모르지만, 하나하나가 모여 지금 살고 있는 거대한 정신 체계인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비물질적인 단자가 끊임없이 움직여 정신적인 체계를 이룬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계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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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생물과 무기물을 나눈것은 인간일 뿐 우리의 인식 범위 외에서는 생물 일 수도 있지 않은가? 고전 물리학을 넘어서 현대 물리학으로 사물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무기물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느낀다.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과거의 철학에서 다루던 요소들이 이해가 손쉬어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머리 속에서만 행했던 가정과 정신에 관한 역학들이 곧 미숙하지만 풀리기 시작 하리라 생각한다.

과거의 DNA를 밝혀 내고 이에 관해서 연구하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는 인간의 지적 능력의 요소를 점점 밝혀 가갈 것이라는 점이 예상된다.

2.17. 칸트, 선에 대한 생각과 결과주의에 대한 비판


칸트는 선의지가 곧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게 한다고 보았다. 선의지는 행동한 다음 생길 어떤 이익이나 결과를 생각하지 않으며, 감정에 따라 행해지지도 않는다. 도덕적으로 옳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행해진다. 모든 사람들은 선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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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는 조금 다른 견해이다.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은 선과 악을 정하는 것과 같다. 선과 악은 주관적이며 이는 감정에 의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의 설명으로는 칸트의 언급이 조금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내가 박사 이력의 작가의 책을 평가한다는게 조금은 지나치게 느껴지긴 한다. 이전에 리뷰했던 책 ‘[책 리뷰] 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델‘에서 언급된 칸트의 생각으로는 인간의 존엄성의 단위로 들어가 더 세부적으로 설명을 한다.

감정적 이익까지 생각하지 못하는 행동은 역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감정적 이익이 배제된 상태의 사람은 의지가 무이고 선의지 조차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언급된 칸트는 도덕 행위의 기인이 이익이면 도덕성을 잃는 것을 뜻하는 걸로 알고 있다. 목적이 이익이면 안되고 그 목적 자체가 선의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말로 알고 있다. 깊이 들어가면 결국은 올바름의 근원인 선의지는 인간의 존엄성에 다다른다.



결과주의는 오늘날 성과를 위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익이 남으면 좋고, 손해를 보면 나쁘다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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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주의가 안좋아 보일 수도 있고 사회의 약자를 강화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좋은 결과가 없다면 그 사회 약자도 존재하지 못할 수 있고 사회 그 자체도 서서히 무너지게 된다. 균형이 주요하다고 본다.

또한 결과주의는 실물에서만 범위를 한정 시키면 이는 매우 부정적이게 보이지만 감정의 영역까지 확장시키면 이는 매우 유연한 수단이며 방법이다. 사회주의의 기반인 온정주의의 뒷받침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제도들은 온정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창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현재와 미래의 다툼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칸트는 다시 의무를 둘로 나눈다. 하나는 ‘의무에 맞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의무에서 우러나오는 행위’이다. 의무에 맞는 행위란 선의지와 관계없이 자신의 이의과 욕심에 따라 행하는 행위를 말한다. 의무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는 단지 행하는 이유가 옳기 때문에 행한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있어서 사람들은 의무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도덕적인 행위를 할 때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단지 당장의 동기만 보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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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와 선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인간 중심적인 요소들이다. 동기의 기원은 무엇인가에 관한 의문만 남을 뿐이다. 동기는 결국 자유의지의 형성에 의해서 자극 되는 의지이다.

결국은 과거의 자신의 기억에서 유출되는 습관과 관습이 당장의 동기일 것이다. 착한일에는 보상이 있으니가 해야만해가 아닌 착한일은 해야만해가 도덕적인 착한일이라는 그 본연의 것 이외의 이유를 붙이면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착한일의 동기의 유발은 인간의 생장 환경과 교육에 의해 결정되는 지극히 우연한 것이라 느껴진다.



2.18. 스피노자, 종말이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내일 이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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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말이라 담았다. 이말을 스피노자 한 말임을 인지하게 되었다.

2.19. 마르크스,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자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에 마찰이 생겨 투쟁을 하고 결론을 지을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만의 이익이 아니라 마찰의 원인과 결과 등을 따져 투쟁 전체의 이익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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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의 의익을 따지는 점에서 공산주의자의 사상은 전형적인 사회주의 사상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언급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상은 자유주의에 더 가까워 보인다. 개인의 자유가 그 어떠한 가치보다 중요한 사상 말이다.

부르주아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족까지도 상품화하였으며, 교육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자는 그런 면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교육만이 어린아이를 공장에서 가정으로 돌아오게 할 유일한 길이라고 마르크스는 주장한다. 무엇보다 어린아이의 교육이 공산주의자와 프롤레타리아트를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이며 장점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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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중요하면 배운이에게 힘을 주는 것은 맞는 듯 싶다. 그러나 어떤 것을 가르치고 배우는 지도 중요한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냐에 따라서 현대에 살지만 원시인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에 관한 내용들을 접하게 되면 시민혁명이 이뤄냈던 같은 유럽이 맞나? 생각된다. 공산주의는 진보적이였던 자유주의를 보수로 만들었고 공산주의가 진보라고 언급한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계급을 언급하며 이들의 투쟁을 선동하는 것 같다.



2.20. 사르트르, 자유에 관한 생각


사르트르는 생각했다. 자유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과 속박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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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있어서 인용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우리가 인정 받는 힘에 의해서 결정 되는 것이다. 인정 받는 힘의 환경은 다른면에서는 속박 일 수 있다. 전쟁 속에서의 자유와 가정 속에서의 자유 등 그 속박에서 말이다.

3. ‘지금은 철학자를 만나야 할 시간(철학자의 생활에서 지정한 삶을 엿보다)’ 리뷰 마무리


읽었던 책 내용에 대한 감상을 적는 것이 쉽지가 않다. 또한 과연 누가 내가 정리하고 느낀 내용을 읽을까 의문이다. 전자책을로 읽은 책을 리뷰한 것은 처음이다. 작년에 구매했던 타블렛이 도움이 되었다.

책은 읽었지만 아직은 리뷰하지 못한 책들이 여러권 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나름 간단하게 리뷰할려고(?) 했던 책이 이런식으로 길어질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 위의 정리한 내용 중에서 몇개를 뽑아 나열해 보겠다.

2.1. 작가가 생각하는 철학과 철학을 대하는 자세
2.10. 데카르트, 방법적 회의, 인간의 감각의 의심 그리고 자아
2.14. 트라시마코스, 정의는 승자의 이익
2.18. 스피노자, 종말이 오더라도…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작가는 철학이 관이라고 언급했다. 머리가 복잡해지기만 하는 것 같다. 내가 느끼기로는 철학은 대상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행위로 보인다. 대상을 알아 내려는 마음으로는 과학과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은 철학자를 만나야 할 시간(철학자의 생활에서 지정한 삶을 엿보다)’는 정말로 많은 수의 철학자들의 삶을 담고 있다. 그래서 깊게는 들어가지 않기에 오해를 할 수 있는 내용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폭넓게 철학자들의 철학을 작가의 눈을 통해 관찰하면서 몇몇은 공감하면서 몇몇은 의문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솔직한 심적으로 작가께서 많이 노력한게 보인다. 그럼에도 조금은 지루한 면이 있었다.

리뷰의 길이로 보면 내용면에서는 나쁘지 않은 책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고민하고 생각하고 느낌을 얻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며 리뷰를 마치겠다.

당신의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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